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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47. <부정공>정운공휘연남가장(井雲公諱淵南家狀)
1. 문헌 목록 〉22. 22世 〉49. <부정공>매헌거사휘연강묘갈명(梅軒居士諱淵壃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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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부정공>강운공휘연묵가장(崗雲公諱淵黙家狀)
崗雲公諱淵黙家狀 府君諱淵黙初諱正基字中玉號崗雲姓趙氏貫玉川高麗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后也悠遠世德備載於祖考狀文中玆不歷叙諱贄祥 贈左承旨諱永舜諱奉根諱炳奎隱居行義是高曾祖禰也妣順興安氏錫相女思齊堂處順后長興任氏冠山君光世后仁采女宜寧南氏考秉允忠景公在后貞淑溫愼早喪所天撫育遺孤克昌家道府君南氏出也 高宗己亥六月六日生府君生而未滿二朞見背慈父被養於重堂及慈氏性行溫直才質清粹言笑有時動止有常諸輩或有非違者則諷剌而化之焉見者莫不稱歎其幼而能行長者之行也王考諄諄戒飭曰古書云讀書起家之本孜孜勿怠俾副乃祖區區之望用光先世綿綿之業也府君恐或違逆書于子張之紳作終身服膺之箴也己酉七月五日王考奄爲棄世府君甫十一歲也攀擗哀號曰余以早孤餘生賴重堂及慈氏而爲命今忽至此世間孰有如我痛迫者哉哭泣不絶時勸食飲於慈氏強加水飲曰汝是古家之後裔屢世之宗孫也盡哀盡禮必致無憾則先考泉臺未伸之痛汝母今日苟生之忠亦將有終矣豈可疎忽於送終之儀節耶府君一遵慈敎不怠不懈不離喪次日上于墓鄉隣稱頌年少而善居喪也既長就學才質慧敏不待敎督能解義趣從叔樵隱翁益加激勵期以遠大府君戰兢自持刻苦勤做矣後就正於族叔龜邨先生先生眷愛益重敎之不倦府君學之不厭見聞日博藝業日新士友推重矣迨弱冠樵隱翁曰汝既成長我亦衰老不堪幹家也盡歸家政府君不勝悶皇雖細微事必爲咨禀恐或有闕於粢盛之奉旨養之供勞於田圃採樵負塩梱屨織席備經千辛百苦不墜家聲暇不撤讀竟成有德之君子人也甞切慨歎祭田之未備墓儀之多闕獨擔一石租累年之拮据供納司直公祭田監察泰仁通德郎公又他先墓協謀于宗中醵出誠金及宗財備物衛墓辛巳丁酉兩次派譜之修編丁丑戊戌如存齋室之建築一遵先父兄之遺命與族叔小軒公終始經畫亟厥吿功可以有補於繼述之世規矣辛巳十月七日母夫人奄忽易簀府君痛父早世倍加悲痛幾不欲生家衆勸食飲陳傷生之戒強加水飲謹守二十七月之制每値夫日哀痛如袒括時必致如在之誠矣年年春秋設花樹會講睦叙倫勸業規過雖長上若有遠越則必施橽曰此非我之自私實門父兄之所命也諸宗咸稱事有權而得正也鄉中有會事難獨斷則折衰衆論取其所長或有衆所難言之端則融會發言言必得中長老推獎頭領矣鄉隣有喪則必法古人先往後來之義即往而監幹喪事也素僻於醉常爲戒飲曰是乃伐性之物不及亂而惟適於氣可也警無恒心而放飲無度者矣曾經大宗中有司之任靖献齋門廊相好亭瓦棟隨廢隨葺一新舊制是爲追遠深誠之一端也以六十八春秋考終于丙午正月十四日遠近嗟悼賢人死也墓盧洞開金洞五代祖考司僕寺正公墓下甲坐原配星州李氏文景公稷后鍾國女幽閑貞淑無遜婦德丁酉九月二十一日生生四男二女休昌即不肖休星休煥休白二女木川張正烈密陽朴鍾澤孫澣容順容福容相容休昌四男台容休星一男甲容采容休煥二男良容休白一男張婿三男基斗基聖基英朴婿一男忠漢餘幼嗚呼府君儒雅謹飭之君子人也孝友慈愛居家之正也勤儉耕讀遺業之安也建齋修譜置田竪石追遠之誠篤也言忠信行篤敬鄉望益重豈不爲偉然哉噫以若府君之德之行未展所蘊竟老於蓬篳之下實爲終天之痛恨也窃恐德行之見泯敢述過庭睹聞之萬一庶或可免不知不明之罪耶伏惟秉筆君子采擇而發揮之千萬祈懇之至 男 休昌 謹狀 강운공휘연묵가장(崗雲公諱淵黙家狀) 부군의 휘는 연묵(淵黙)이요, 초휘는 정기(正基)며, 자는 중옥(中玉)이고, 호는 강운이요, 성은 조씨며, 관향은 옥천이고 고려 겸교대장군 문하시중 휘 장(璋)의 후손이다. 길고 먼 세덕은 조고 장문중에 갖추어 실렸으므로 이에 첩록치 아니하고, 휘 지상(贄祥) 증좌승지 휘 영순(永舜), 휘 봉근(奉根), 휘 병규(炳奎)는 숨어 살며 의리를 행하였으니 곧 고·증·조·고였다. 비는 순흥 안씨(順興安氏) 석상(錫相)의 따님인데, 사제당(思齊堂) 처순(處順)의 후손이요, 장흥 임씨(長興任氏) 관산군(冠山君) 광세(光世) 후 인채(仁采)의 따님이며, 의령 남씨(宜寧南氏) 병윤(秉允)의 따님으로 충경공(忠景公) 재(在)의 후였다. 정숙 온순하였는데 일찍 군자를 잃고 남긴 고아를 어루만져 기르며 가도를 창성하였는데 부군은 남씨 소생이다. 고종(高宗) 기해년(一八九九年) 六월 六일에 부군이 출생하였는데 나서 二년 미만에 아버지를 잃고 중당 및 자친의 교육을 받았는데 성품이 곧으며 재질이 맑고 온전하며 말과 웃음이 장소와 때가 있고 행동거지가 떳떳하여 혹 비위가 있는 자가 있으면 빗대고 비유하는 뜻으로 교화하니 보는 자마다 칭찬하지 아니한 자 없었고 어른의 행한 바를 행하였다. 왕고가 거듭거듭 경계하되 옛글에 「글 읽는 것은 집을 일으킬 근본이라.」 하였으니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하여 이 조부의 구구한 소망을 이루고 선세에 계승한 업을 빛내라 하니 부군이 혹 어길까 두려워하여 자장의 띠에 써서 몸이 마치도록 가슴에 품을 경계로 삼았다. 기유년(己酉年) 七월 五일에 왕고가 문득 세상을 떠나니 부군의 나이 겨우 十一세로 부어잡고 가슴을 치며 슬피 부르짖으며 「내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외로운 인생으로 중당 및 자친의 힘을 입어 보명하였는데 이제 문득 이에 이르니 세간의 누가 나같이 통박한 자가 있으리오.」 하고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때로 식음을 자씨에게 권함에 강연히 식음을 더하며 말하기를, 「너는 이 고가의 후예요, 누대 종손이니 슬픔을 다하고 예를 다하여 반드시 어긋남이 없이 한즉 선고의 지하에서 펴지 못한 슬픔과 너의 모친이 오늘날 구차히 사는 충직이 또한 장차 끝이 있을 것이니 어찌 송종의 의절을 소홀히 하겠는가.」 하였다. 부군이 한결같이 자친의 가르침에 따라 상차를 떠나지 않고 날로 무덤에 오르니 향린이 거상을 착실히 한다고 칭송하였다. 장성하여 서당에 나가 재질이 영민함으로 가르치고 감독하지 아니하여도 능히 뜻을 해득하니 종숙 초은옹이 더욱 격려를 더하여 멀리 기망함에 부군이 조심하여 몸을 가지고 근고하며 독공하다가 후에 족숙 귀촌 선생께 취정하니 선생이 권애가 더욱 두터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고 부군이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니 견문이 날로 넓고 학업이 날로 새로우니 사우가 추중하였다. 二十세에 초은옹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고 나 또한 노쇠하여 가사를 간여하지 못하겠다.」하고 가사를 맡기니 부군이 민답하여 비록 미세한 일이라도 반드시 품고하고 혹 제수의 봉진과 지체의 공양이 궐할까 하여 전원에 나가 노력하고 땔나무를 하며 소금을 지고 신을 삼고 자리를 짜는 등 천신만고 가성을 떨어뜨리지 않고 글을 읽어 마침내 덕있는 군자가 되었다. 일찍 제전의 부족과 묘의의 미비를 개탄하여 홀로 부담한 한섬 벼를 여러 해 이식하여 사직공 제전을 장만하여 바치고 감찰 태인 통덕랑공 기타 선묘는 종중에 협모하여 성금을 내서 종재와 합하여 석물을 갖추어 묘역을 효위하고, 신사(辛巳), 정유(丁酉) 양차 파보의 편수와 정축(丁丑), 무술(戊戌) 여존제실의 건축은 한결같이 선부형의 유명에 따라 족숙 소헌공과 더불어 종시 경획하여 빨리 준공을 고하니 가히 계술의 세규에 도움이 있었다. 신사년(辛巳年) 十월 七일에 모부인이 문득 세상을 떠나니 부군이 선고가 일찍 하세함으로써 배나 더 슬퍼하여 죽고자 하니 가족이 음식을 권하고 상생의 경계 타이르니 억지로 수음을 더하여 삼가 二十七월의 예제를 지키고 매양 그날을 당하면 초상 때 같이 슬퍼하여 반드시 살아계신 것 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해마다 춘추로 화수회를 소집하여 돈목을 강론하고 천륜을 펴며 업을 권하고 과실을 규제하며 비록 어른이라도 만일 어기고 지나치면 반드시 매를 때리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의사가 아니요, 실상 문부형의 명령한 바라.」하니 모든 겨레가 다 일이 중용을 얻어 정당하다 하였다. 향중에 모임이 있어 일이 독단하기 어려우면 여러 말을 절충하여 그 장점을 취하여 처리하였다. 이웃 마을에 상사가 있으면 반드시 옛사람의 「먼저가고 뒤에 온뜻」을 본받아 곧 가서 상사를 간검하고, 본래 술을 좋아하나 항상 마시기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는 성정을 흐려 미치게하는 약이니 과음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였다. 일찍 대종중 유사를 지내며 정헌재문과 행랑이며 상호정의 기와 기둥을 수리하여 구제를 일신하게 하였으니 이는 추원 감모의 일단이었다. 병오년(丙午年) 一월 十四일 六十八세로 고종하니 원근 인사가 다 슬퍼하며 어진 사람이 죽었다 하였다. 묘소는 노동 개금동 五대 조고 사복시정공 묘소 아래 갑좌원이고 부인은 성주 이씨(星州李氏) 문경공(文景公) 직(稷)의 후, 종국(鍾國)의 따님으로 유한 정숙하고 부덕이 있었다. 정유년(丁酉年) 九월 二十一일에 출생하여 四남 二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휴창(休昌), 휴성(休星), 휴환(休煥), 휴백(休白)이요, 딸은 목천(木川) 장정열(張正烈) 밀양(密陽) 박종택(朴鍾澤)의 처며, 손자 한용(澣容), 순용(順容), 복용(福容), 상용(相容)은 큰아들 소생이요, 태용(台容)은 둘째아들 소생이며, 갑용(甲容), 채용(采容)은 세째아들 소생이고, 양용(良容)은 네째아들 소생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아! 부군은 유도의 바른 의리를 삼가 지킨 군자로 효도하고 우애하며 사랑한 것은 바른 길이요 근검하여 갈고 읽은 것은 끼친 업을 편안히 한 것이며 재각을 짖고 보첩을 편수하고 제전을 사고 석물을 세운 것은 멀리 추모한 정성이다. 말이 충신하고 행실이 독경하여 여망이 더욱 무거우니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아! 부군의 덕행으로 쌓은 포부를 펴지 못하고 마침내 가시 사립문 밑에서 늙으니 진실로 하늘에 사무친 슬픈 한이다. 덕행의 민몰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뜰을 지나며 보고 들은 바 만의 일을 기술하니 가히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한 죄를 면할 것인가. 엎드려 생각하니 붓을 잡은 군자는 가려서 발휘하기를 정성을 다하여 비나이다. 아들 휴창(休昌)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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